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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Journal


자아의 가면 벗기기 -문학정신 1992년 11월호 1992.10.22 경기일보
 김원희  | 2006·01·06 20:01 | HIT : 3,771 | VOTE : 741 |
문학정신 1992년 11월호
 문화시평 미술 pp.208-209.

자아의 가면 벗기기 
                                                                                               이재언 /미술평론가
 
 현영숙과 김원희가 하나의 조합 속에 묶이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적이다. 두 사람이 여류작가라는 사실 외에는 서로가 면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이데올로기를 함께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무작위 추출에 가까운 표집에 의하여 하나의 괄호 속에 묶일 수 있는 것은 오늘날의 회화가 지향하고 있는 미학의 근간을 부분적으로나마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양자는 물론 서로 상이한 방언적인 화면 양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화면 깊숙하게 접근해 들어가면 비슷한 미학의 궤를 달리고 있음을 발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신과학적 상상력과 원초적 감성의 발산이라는 동시대적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일치하고 있다.

 한동안 우리의 회화가 상상력과 감성을 억제한 채 로고스적인 것과 거시적인 담화에만 집착하여 창백해진 예술의 얼굴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상상력은 정신적 생산력 자체이다.’ 라고 바슐라르도 지적한 바 있지만, 상상력은 결코 이원론적 입장에서만 파악해서는 안 되는 인간의 정신 기능이다. 그야말로 사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중요한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래의 서구문화 체계 속에서 대체로 그것들이 억압되었다가 이제야 해방되기에 이른 것이다. 바로 이 두 작가가 이러한 상상력과 감성의 분출이라는 시대 현상에 동참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하고자한다.

 현영숙은 미국 프랫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여서는 국내 첫 개인전(92.9.25-10.1, 소나무 갤러리)을 가진바 있다. 그녀의 경우는 무엇보다 시각의식과 공간의식 방언적이고 독백적인 표출에 미의식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화면들은 대체로 기억의 파편들이 부유하고 혼재하는 가운데, 독백하는 자아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일종의 반성적 사유가 유추되고 있다. 사실 긴밀하고 정연한 의미론이 대체로 기계“적인 도구언어의 재생산에만 기여할 뿐이며, 본원적 유희가 좌절된 자아에 초자아의 가면만을 강요해온 사실을 심층적으로 반성하고 나선 것이다.

 따라서 그녀에겐 억압적 의미론의 사슬을 풀어헤친 의식의 자율성과 본원적 유희성이라는 배출구가 마련되는 것이다. 이러한 유추적 심증은 그녀의 화면을 대할 때 더욱 선명해진다. 그녀의 화면에는 기억의 현상은 있되 기억의 대상은 그다지 분명치가 않다. 형상적으로 이지러져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은폐되거나 혹은 서로 단절되어 있다. 사과’ 나 ‘새’ ‘벽돌집’ 과 같은 형상들이 엄격한 시각질서 위에 있지도 않으며, 기호적- 지시적 기능의 짐이 실려 있지도 않다. 또한 그 기억의 파편들을 구조화시키기를 습관적으로 수행하는 의식의 개입도 여의치가 않다. 그러므로 화면은 파편의 혼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기억속의 이미지들은 콜라주 방식이나 혹은 모노톤으로 은폐된 화면처럼 틈새로 주어지고 있어, 현실이나 환경 혹은 경험 대상이 시각적으로 갖은 흡인력을 감소시키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수묵효과가 감도는 단색조의 화면이 동양적 감성의 일단을 모여주고 있음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억의 파노라마를 과거적 시간 구조에 용해시켜 시간적 경과에 퇴색된 이미지로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화면은 기억 속의 대상과 그것들의 시각질서 등에만 비중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 대상들의 이미지들이 그려지고 있는 방식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이 이미지들이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만이 과거의 유아적 심장으로 회귀하거나 혹은 유아적 충동을 회고하여 그려진 것이 아니가하는 추측을 가져볼만 하다.

 사실 화면 속에 그려진 이미지들은 아이들의 낙서를 연성케 하는 면이 다분하다. 이것들이 기억의 대상( 따라서 재현하고자 한 대상)이었던 것이라기보다는 기억이라는 정신적, 심리적 현상이나 혹은 자연적 충동 속에 유희하는 자아의 지향성에 대한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할 수 있다.

 한편 김원희는 근 십여 년 교육현장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양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왕성한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작가이다. 최근 가진 두 번째 개인전(1992.10.2-15. 자하문 미술관)에서 그녀는 ‘생명-연작’ 들을 통해 생명의 원초적 에너지와 그 운동을 상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강한 원색과 강한 대비의 색조,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은 유동적 형체의 화면, 무언가를 뿜어내고 있는 격정적인 필치들이 모두 생명의 에너지를 시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분비하고 있는 것이다.

 캔버스의 사각형마저도 거부하는 것은 단순한 형태적 선택이나 취향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다. 기존의 제도나 고정관념, 인식의 틀 까지를 포함한 모든 경직되고 권위 화 된 것들에 대한 냉소를 보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양한 재료들의 합성도 이러한 맥락에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있었던 첫 개인전에서 보인 거칠 정도의 힘찬 필치나 강한 색조 등은 대체로 견지되고 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역동적인 구조의 추상적 형태와 기호적 형태를 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진화론적 생명의 시원을 연상하는 원생동물의 이미지나 포지티브 공간과 네거티브 공간의 대위적 구성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그녀는 하나의 상징체계를 새로운 표현주의적 방법에 대입하여 자신의 조형세계를 구축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음과 양, 정신과 물질, 생명과 소멸의 원환적 동일성에 입각한 동양적 세계관을 시사하고 있는 것은 우리 미술의 미학적 지주가 주체적 입장으로 선화하고 있는 징후의 한 단면일 수도 있다. 이렇게 두 작가의 회화가 밀폐되어 있었던 감성과 상상력의 보고를 열기 시작한 것은 오늘날 임간이 처한 상황과도 관련이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소외되어가는 기계 문명 속에서 근원적인 자연과 인간의 회복을 위한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영숙은 가장 소박한 낙서 행위와 그것의 형태를 빌리고 있으며, 미래의 인간의 이상을 기억의 자연에서 구현하고자하는 것이다.

 또한 김원희는 주체의식 및 행위를 매개로 한, 그것 자체가 작품의 큰 몫이 되는 역동적인 화면을 통해 주체의 위상을 복권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양자의 작품들은 결국 생명의 경외심을 환기시키는 새로운 조응관계 속에서 만날 수 가 있는 것이다.

 이렇듯 회화의 본질적 전환기에 있어 자신들의 몫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자기 몫의 과제를 도한 안고 있다는 자신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영숙의 경우는 커다란 화면에 비해 이완되고 산만한 이미지 대상들이 구성방식을 어떤 형태로든 더욱 천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로 요약 할 수 있겠다.

한편 김원희의 경우는 강열하고 역동적인 화면의 양상들이 에너지 과잉과 마니아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거두는 성취도 못지않게 나타날 이질적인 감성과 그에 따른 저항감에 직면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이 소외되고 자연이 파괴되고 있는 오늘날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이들이 기도하는 감성과 상상력의 복원은 의의를 가지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 이유는 오늘날 첨단 메커니즘을 빌린 조작과 작위의 매체미술이 극에 달해 있는 만큼, 인간 존재에 대한 반성을 도한 진지하게 모색해야 할 과제가 역사적으로 부과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이 인간구원의 요체일 것이라는 믿음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 존재의 궤적과 생기와 체온을 환기시키는 것만이라도 요구 된다는 것이다.

1992년 자하문 미술관 2번째 개인전 기사 경기일보 1992.10.02
중략-
2일부터 15일까지 서울 자하문 미술관에서 2번째 개인전을 갖고 있는 김원희씨(안양시 비산2동 미륭아파트)는 <생명>을 주제로한 전시에서 <나의 실존을 밝히는 일, 인간을 탐구하고  현실을 인식하고 그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발가벗기우는 일 그 것이 나의 작업의 시발점> 이라고 얘기한다. 
< 신들림의 혼으로 그린 듯한 박품들은 원초적인 무의식이 투영된 자연 그자체 같다.
미술평론가 이재언씨는 < 그의 작품은 생명체로서의 존재의 본능적 충동과 운동이 대사하는 분비물 같다. 원초적이고 원생적인 생명을 향한 모종의 몸짓들이야말로 그의 작품이 가지는 본질이다. 라고 평한다. 광기같은 것이 느껴지는 강렬한 색채의 작품들은 거칠기가 이를데 없이 격렬하면서도 에너지가 과잉 분출 된 듯이 반항적인 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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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 저널 1991.11  김원희 06·01·06 4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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