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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 / Exhibition


hybrids-스페인작가전 2007
 김원희  | 2007·09·13 11:13 | HIT : 5,223 | VOTE : 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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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brids

장소 인사동 SK 허브빌딩 지하 1층 107호 02-732-8846
시간 2007.9.12(수)~21(금) 오프닝 6:00pm
전시내용: Hybrids 라는 주제로 전시
스페인작가 4명 한국작가 1명
Pepe Buitrago 회화
Morua 회화
Ramón Moral-Abad’회화
Chema Gil; 조각 사진
Kim Won Hee ; 회화


Hybrids 2007.9.12~21.

The second highest building in the world, at a height of 620m and 150 floors, will be built in Yongsan, in the heart of Seoul, in the year 2013.

620m 150 층으로 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 2013년, 서울의 심장부, 용산에 지어질 것이다.

It is in Korea where the highest buildings in the world are built, among the Buddhist temples summoning to prayer through bells reproducing the cry of sea dragons that so frightened whales.

고래를 깜짝 놀라게 해서 바다용의 울음을 만들어내는 벨을 통해 기도자를 불러들이는 사원 중,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지어진 곳이 한국이다.

When two different species cross, a new hybrid creature is born. The hybrid born from the cohabitation between the East and the West grows in Korea.
서로 다른 두 개의 종이 교배할 때 새로운 혼성물이 태어난다. 동양과 서양의 공존에서 태어난 혼성이 한국에서 자라고 있다.

Sometimes, from the mixture of heterogeneous elements, harmony is born, just as it blooms in Nam June Paik’s hybridized art, in which the East and the West cross in a reflective quest of roots. The work by this western educated Korean video-artist has a foundational character for the art of the second half of the 20th century.
이질적인 요소의 혼합물이 때로는 조화를 이루어 태어난다. 동서양의 뿌리가 이종교배해서 백남준의 혼합예술이 피어난 것처럼, 서양교육을 받은 한국의 비디오 작가의 작품은 20세기 후반부의 예술의 기본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In TV Buda (1974), that symbolic union by Nam June Paik is brought to life. A sitting sculpture of Buddha confronts the image of its face reproduced in a close-circuit television. Images pouring out from the TV boxes are those that have gone deep into the hybridizing, or the influence, between both worlds.

TV Buda에서 백남준에 의한 상징적인 결합이 활기를 띄게 되었다. 부다의 좌상은 텔레비전에 나온 얼굴의 이미지와 비교된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이미지는 두 세계 사이의 혼성교배나 영향력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In this exhibition in which a Korean artist and four Spanish creators participate, the interwoven threads between both shores can be detected.

한 명의 한국 예술가와 4명의 스페인 예술가들이 참가한 이번 전시회에서 두 개의 영역의 이문화가 뒤섞여 짜여진 조화를 이룬 실타래를 감지할 수 있다.


In the cascades of images with resonances from Western art in Kim Weon-Hee’s work, there is an open door allowing the fecundation of both worlds. Through a new representation of reality that Gauguin sought in the South Seas, and that was already present in Eastern representations, flooded with the Pop-Art’s aesthetic, sail Veermer and Lichtenstein, Picasso and Matisse, but the boat is being led by a fantastic triad: a new sea dragon, son of Magritte’s bowler hats and clouds; Chagall’s dreams and Richter’s out-of-focus reality, inhabiting waters criss-crossed with roses, orange poppies and shades, as seaweeds of pre-Raphaelite Ophelias.

김원희의 작품은 서양예술에서 울려 퍼지는 이미지의 폭포 안에 두 세계의 결합을 허용하는 문이 열려있다. 고갱이 남쪽 해안에서 찾았던 실재의 새로운 재현이 이미 동양적 재현 안에 표현이 되었듯이 팝아트의 미학이 함께 넘쳐나며, 베르미어Veermer 와 리히텐시타인 Lichtenstein, 피카소Picasso와 마티스 Matisse로 항해해 나아간다. 그러나 그 배는 새로운 해룡, Magritte 중절모자의 아들과 구름, Chagall의 꿈과 리히터Richter의 흐리게 그리기, 장미들과 엇갈린 패턴들, 오렌지색 양귀비와 그림자들, 그것은 마치 라파엘전파 오필리아의 Raphaelite Ophelias 해초와 같은 환상적인 세 요소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

The last work created in his New York study by Nam Yune Paik, Om-mah (Mother), is a melancholy memory of his Korean roots. A traditional Korean dress of subtle orangish glazes is suspended in the space in front of a TV monitor in which some kids play and dance. Chema Gil’s images, in which there are also suspended gowns, have that melancholy, too, but with less romantic mists and a gloomier surrealism echoing secret desires. His echoes are of brides dressed by Bellmer of Cindy Sherman, rather than of Mother Earth. He creates a universe in his images where he tells us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a story, or the two faces of one         same story, or the two vital principles. Paik would be playing with Tao, the principle generating all things, and Chema Gil with the Yin-Yang, the opposed complementing forces, the two basic principles of Eastern philosophy.

백남준의 뉴욕 연구에서 만들어진 마지막 작품 <엄마>는 그의 한국인의 뿌리에 대한 우울한 기억이다. 오렌지 빛 광택의 전통적인 한국 옷은 아이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TV앞의 공간에서 마음을 떠돌게 한다. 가운을 입은 채 들떠있는 Chema Gil의 이미지 역시 그러한 우울함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별로 낭만적이지 않은 안개와 비밀스러운 욕망을 반향하는 좀 더 우울한 초현실주의를 담은 우울함이다. 그의 반향은 Cindy Sherman의 Bellmer에 의해 입혀진 어머니의 대지라기보다는 신부와 같다. 그는 하나의 이야기, 혹은 똑같은 이야기의 두 얼굴, 혹은 두 개의 생명력 있는 원리의 시작과 끝을 말해주는 그의 이미지 안에서 하나의 우주를 창조한다. 백남준은 모든 사물을 생성해내는 원리 도Tao와, 동양철학의 기본적인 원리인 두 개의 반대되는 힘을 보완하는 음양(Yin-Yang)오행설이 담겨있는 Chema Gil 과 함께 놀이를 하게 될 것이다.

In one         of his installations, Paik, using his hair as a paintbrush, traces with indian ink a long black trail on a white roll of paper spread on the floor. The stroke of that line, containing all the mysterious signs of Eastern writing, is a breach that allows us to enter into another reality. In Morua’s works, that black line is a gorge in a magical landscape that, just like the open wounds in Fontana’s canvases, allows us to penetrate into what is beyond the mirror. Abstraction, an absence of tales, is turned into a passageway for reflection on the images of the world. Pablo Palazuelo’s mathematical abstraction admits having the secret of vacuum through eastern philosophy. In Morua’s abstraction, with a more violent brushstroke, a de-materialisation of landscape also alludes to a neutral, embryional matter, to primal energy magma from which the whole Universe springs. His canvasses are a fault, a defile, a fissure through which lava oozes.

백남준은 그의 설치미술에서 붓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사용하면서 흰색의 두루마리 종이위에 길고 검은 수묵화의 흔적을 마루바닥에 뿌린다. 동양 서체의 신비스러운 기호를 포함하고 있는 그 선을 치면 우리를 또 다른 현실세계(reality)로 들어가도록 하는 돌파구가 생기게 된다. Fontana의 유화에 들어난 상처가 우리에게 거울을 초월하여 관통하도록 하는 것처럼, Morua의 작품들 중 검은색은 마술적인 풍경화에서 협곡에 해당된다. 이야기가 없는 추상은 세상의 이미지를 반영하는 출구로 변하게 된다. Pablo palazuelo의 수학적 추상은 동양 철학을 통하여 진공의 비밀을 갖도록 허용한다. 격렬한 붓질을 가한 Morua의 추상작품에서, 풍경화의 비 물질화는 중립적, 배아기의 물질, 전 우주를 솟아나게 하는 제1의 에너지 마그마를 암시하고 있다. 그의 유화는 용암이 새어나오는 단층, 협곡, 틈이다.

Nam June Paik has a powerful sculpture, More Logias less Loggins, in which a tree, a giant maple, built with television screens, loudspeakers and antique radios, and covered with cables evoking the lianas of a technological forest, tries to recall the old world, where there were still trees. In Ramón Moral-Abad’s works, there is a geometrical abstraction of woods. Buried by the essential forms of nature, spheres, squares, in which textures, wood grains, are powerfully striking as the memory of the trees that onc        e were, they sketch those old woods of maples, poplars, black poplars, fir trees covering Korean mountains, like dream landscapes among the mists of deep-waters lakes and full-moon nights.
텔레비전 스크린과 함께한 건물, 성량이 큰 스피커, 고대의 라디오로 지어진 그리고 기술적인 숲의 리아나를 환기시키는 케이블로 덮인 나무, 거대한 단풍나무가 옛 세계를 상기시키려고 하는 곳에서, 아직도 나무가 있는 곳에서 백남준은 Loggins보다는 기하학에 가까운 힘 있는 조각상을 갖고 있다. Ramón Moral-Abad의 작품에는 나무의 기하학적인 추상성이 있다. 조직, 나무의 결이 강력하게 나타나는 자연, 지구, 광장의 기본적인 형태로 몰두한 채(buried) , 그들은 안개 낀 호수, 보름달 밤의 꿈의 풍경화처럼 한국의 산을 덮고 있는 단풍나무, 포플러나무, 검은 포플러, 전나무를 스케치한다.


At the turn of the century, and after a near fatal stroke in which a part of his life crossed the Styx, Nan June Paik started to work with the laser ray. In his installations and sculptures with laser, he interacts with nature, with the architectonic space, and with light, in order to generate new sensations in space, altering it in a very subtle way. For him, the laser has a new mystic, provoking psychological effects on the viewer; it has a connection with spiritual world. It is an extension of video art, but one         that, paradoxically, cannot be shown by TV.
세기를 전환점으로 운명적인 저승의 강(styx)뇌졸중 이후 백남준은 레이저를 이용하여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공간에서 새로운 센세이션을 생성하기 위해, 미세(미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변경하면서, 레이저를 이용한 그의 설치미술과 조각 작품에서 그는 자연, architectonic(건축술, 구성적) 공간, 빛과 상호작용한다. 그에게 레이저는 새로운 신비를 갖게 된다, 관중에게 심리적인 효과를 자아내면서; 그것은 정신적인 세계와 관계가 있다. 그것은 비디오 예술의 확장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텔레비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In Pepe Buitrago’s works, the laser is also present. It is part of the diptych series Tones of Voice. By using indian ink, watercolours and holography, they are turned into the painstakingly worked illustrations of a Book of Hours, of a miniature codex. On one         hand we have the text, mostly crossed out, letting us read just some words. On the other, we have the holographic image, the laser, pursuing the full reproduction, in its three dimensions, of the represented objects. Buitrago draws carefully the strokes crossing out the words, suggesting a quality of Eastern ideograms. Korean writing is a synthesis between pictograms and phonetic symbols, as it is hybrid writing, too — the one         generated between the empty line and the saved word. In these works, signs and images are mixed that appeal to the knowing gaze of the viewer, generating holistic images of the represented reality, although this does not agree with today’s codes of world representation.

Pepe Buitrago의 작품에서 레이저 또한 나타난다. 그것은 목소리 톤의 두 개의 기록판 연속물의 부문이다. 수묵화, 수채화, 홀로그래피를 이용하여 그들은 시간의 책, 사본의 축소판
삽화로 변하게 된다. 한편, 우리는 단어를 읽게 하는 것과 마찬 가지고 이종교배(잡종)의 교재를 갖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물체의 3차원으로 된 완전한 재현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홀로그래픽 이미지, 레이저를 갖고 있다. 동양의 표의문자를 암시하면서, Buitrago는 단어(말)을 제거하면서 선을 그리고 있다. 한국의 문자는 텅 빈 선과 자장(saved) 된 단어 사이에 생성된 이종 교배된 문자처럼 상형문자와 음성기호의 합성물이다. 이 작품에서 기호와 이미지(signs and images)는 관람자에서 뚫어져라 보도록 혼합되어 있다. 비록 이것이 세계를 대표하는 오늘날의 코드는 아니지만, 실재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생성하면서,

When it comes to contemplating images, Koreans and Spaniards are not different in their expectations anymore. Gauguin discovered that in the dream islands, it was not possible to cleanse one        ’s way of looking either, since wherever you travel to, what one         has seen before, and everything we have already seen, has made us hybrid creatures.

이미지에 대해 심사숙고해 보건대, 한국인과 스페인들은 기대치가 더 이상 다르지 않다. 고갱은 꿈의 섬에서 관점의 방식을 정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러분이 어디로 여행하든지, 사람이 전에 무엇을 보았든지 간에 그리고 이미 우리가 본 모든 것은 우리를 혼성의 생명체로 만들었다.









When with his highly sensitive spirit Marcel Proust tried to recover lost time, he knew that nature can be perceived in different manners: It is not just the physical world that is different from the way we see it — any reality might well be as dissimilar from what we believe to be directly perceiving, as the trees, the sun and the sky would be if they were watched by beings provided with eyes differently constituted from ours, or having for this task organs other than eyes that rendered different, non visual, equivalents of the trees, the sky and the sun.

Marcel Proust가 그의 고도의 민감한 정신으로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려고 노력 했을때 그는 자연이 다른 방식으로 지각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즉,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른 물질적인 세계는 아니다.-어떠한 reality도 우리가 직접적으로 인식한다고 믿는 것과는 마땅히 다를 것이다. 나무, 태양, 하늘이 우리와 다르게 구성된 눈으로 제공되어 관찰된다면 그것들도 다를 것이다.

The East and the West have just our eyes to contemplate the world, and the eyes with which we perceive the trees, the sky and the sun are all equally made up, but the sediment deposited by time ended up building landscapes that were differently contemplated. Now, those eyes are still seeing from an identical interior fire, both gazes have been mixed into a single one        , and in the landscape we are contemplating dwell the same sea-dragons.

동서양 사람들은 똑같이 세상을 관조하는 눈을 갖고 있다. 우리가 나무, 하늘 태양을 인식하는 눈은 똑같이 이루어져 있지만 시간으로 적립된 침전물은 다르게 관조된 풍경화를 그리면서 끝이 난다(정결 된다). 지금 그러한 눈들은 아직도 똑같은 내적인 정열로 부터 바라보고 있고, 둘의 응시는 하나의 것으로 섞이게 되고 풍경화에서 우리는 똑같은 해룡(바다의 용)이 존재한다는 것을 관찰하게 된다.


Carmen Dalmau (Art Cri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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